참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렇게 말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괜찮아, 그냥 참자.”
“지금 말하면 더 복잡해지니까, 마음에 담자.”
우리는 때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어른스러운 일’이라 믿고 살아갑니다.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 유약하거나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참는다고 감정이 사라질까요? 아니면, 그 감정은 어디론가 숨어버릴까요?
사실 억눌린 감정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뇌 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저장되며, 시간이 지나도 흔적을 남깁니다. 때로는 신체적 증상으로, 때로는 관계의 갈등으로,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형태를 바꿔 나타나곤 합니다.
오늘은 ‘억눌린 감정’이 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리가 왜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남긴 흔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를 함께 나누어 보려 합니다.
1. 감정은 생각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남습니다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닙니다. 생존과 적응을 위해 뇌가 설계한 신호 체계입니다. 화가 날 때 심장이 빨리 뛰고, 불안할 때 손에 땀이 나는 것도 뇌가 몸 전체에 ‘지금 위험해’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억눌린 감정이란, 이 신호를 ‘무시하거나 차단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뇌는 여전히 그 감정을 처리하려고 애씁니다. 이때 주로 관여하는 뇌 부위가 편도체와 해마, 그리고 전전두엽입니다.
- 편도체는 감정의 경보장치입니다. 화, 두려움, 불안을 인식하고 즉각 반응하게 하죠. 감정을 억누를수록 편도체는 점점 더 민감해지고, 사소한 자극에도 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 해마는 기억과 연결된 감정의 저장고입니다. 억눌린 감정은 잊힌 것처럼 보이지만, 해마에 각인되어 유사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다시 불쑥 떠오르곤 합니다.
- 전전두엽은 감정을 조절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하는데, 억누르는 패턴이 반복되면 이 기능 자체가 무뎌질 수 있습니다. 즉, 감정 표현이 점점 어려워지고 상황 판단도 흐려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감정은 ‘처리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뇌 속에 흔적처럼 남아, 예상치 못한 시점에 우리를 흔들 수 있습니다.
2. 억눌린 감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
감정이 억눌리면 뇌뿐 아니라 신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자율신경계가 긴장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불안을 오랫동안 억누르면 교감신경계가 과도하게 작동하여, 다음과 같은 신체 반응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만성 두통이나 소화 불량
- 이유 없는 피로감
- 잦은 어깨 결림이나 근육통
- 불면증 혹은 과도한 수면
- 면역력 저하
이런 증상은 병원에 가도 ‘특별한 이상 없음’이라는 말을 듣기 쉬운 정서적 신체화 증상입니다. 즉, 억눌린 감정이 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어릴 때부터 감정을 눌러온 사람일수록, 자신의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고 “그냥 늘 무기력해요”, “항상 피곤하고 기운이 없어요” 같은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이 경우, 문제는 체력보다 감정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눌린 감정은 표현되지 않을 뿐이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로, 표정으로, 관계에서 표현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뇌와 몸을 자극하며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3. 감정 억압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그림자
감정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억눌린 감정은 결국 관계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억누르면, 그 화는 무관한 상황에서 터져버리거나, 아이에게 차가운 말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는 연인 사이에서 ‘말하면 싸움될까 봐’ 감정을 눌러두다 보면, 결국 상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거리감만 커지게 됩니다.
이처럼 억눌린 감정은 직접 표현되지 않더라도, 관계의 질을 떨어뜨리고, 심지어 반복적인 오해와 갈등을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뇌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비하게 되므로, 점점 감정 표현이 서툴고 관계 속에서 피로해지기 쉽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억눌린 감정이 오래되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도 금이 간다는 점입니다. 자기 감정을 무시하고 억누르다 보면,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가 형성됩니다.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기 비난이 심해지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결국 억눌린 감정은 단지 ‘내가 참는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온기를 앗아가는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4. 감정을 이해하고 회복하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고, 뇌에 남긴 흔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아래 방법들을 일상에서 시도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1. 감정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난 화가 나고 있다", "난 지금 슬프다"라고 스스로 말해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조금 가벼워집니다. 억누르기보다 ‘존중’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2. 안전한 사람과 감정을 나누세요.
가족, 친구, 혹은 상담사와 솔직한 대화를 시도해 보세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뇌는 ‘이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구나’라고 인식하며 편도체의 긴장을 낮춰줍니다.
3.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정리해보세요.
일기나 감정노트처럼, 지금 느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적는 습관은 해마와 전전두엽 간 연결을 돕고 감정의 통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4. 몸의 긴장을 풀어주세요.
스트레칭, 요가, 명상, 심호흡 등으로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되찾아주세요. 억눌린 감정은 몸에 먼저 저장되므로, 몸을 먼저 풀면 마음도 따라 풀어집니다.
5.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메시지입니다. 당신 안의 감정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감정은 '버텨야 할 것'이 아니라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억눌린 감정은 참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뇌 속에 조용히 각인되어, 우리의 몸, 관계, 삶의 방향까지 바꿔놓습니다. 그렇기에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표현하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눌러왔던 감정들이 있다면, 오늘만큼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세요.
“나는 감정을 느껴도 괜찮은 사람이다.”
그 말 한마디가, 뇌의 편도체를 진정시키고 전전두엽을 깨우며, 당신 삶을 더 가볍고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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